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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고구려.' Three kingdoms era, Goguryeo.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31]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 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왕을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들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삼국시대의 언어

삼국사기에 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Three Kingdoms Era

Goguryeo

Goguryeo was founded in 37 BCE by Jumong (posthumous name Dongmyeongseong).Later, King Taejo centralized the government. Goguryeo was also the first Korean kingdom to adopt Buddhism as the state religion in 372, under King Sosurim reign.

Goguryeo reached its zenith in the fifth century, when reign of the King Gwanggaeto and his son, King Jangsu expanded into almost all of Manchuria and part of inner Mongolia, and took the Seoul region from Baekje. Gwanggaeto and Jangsu subdued Baekje and Silla during their times.

Goguryeo later fought and defeated massive Chinese invasions in the Goguryeo-Sui War of 598 - 614, contributing to Sui's fall, and continued to repel the Tang dynasty under several important generals including Yeon Gaesomun and Yang Manchun (see Goguryeo–Tang Wars).

However, numerous wars with China exhausted Goguryeo and it fell into a weak state. After internal power struggles, it was conquered by an allied Silla-Tang forces in 668.
Gilt-bronze Incense Burner of Baekje

원본: 위키피디아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